이희문, 혹자는 그를 조선의 아이돌이라 부른다!

2016.10.06

이희문, 혹자는 그를 조선의 아이돌이라 부른다!
 


90년대 몇몇 해금 연주자들이 당시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내놓았고 대중은 국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었다. 그 이후, 퓨전국악 혹은 창작국악이라는 이름으로 국악이 대중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최근 언론이 경기민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경기민요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깨고 펑크한 파마머리 가발과 반바지 때로는 하이힐과 망사스타킹까지 파격적인 무대와 경기민요를 고급스럽게 혹은 B급스럽게 만든 이희문이 그 중심에 있다.
이희문이 다른 아티스트와 다른 점은 대중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수요자 마인드의 공연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사고 할 수 있게 하는지 궁금하다.
그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보면 그의 미래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인터뷰를 시작한다. 

▲ 소리꾼 이희문 © 이강혁

▲ 소리꾼 이희문 © 이강혁

이희문의 과거

무대 위에서의 모습을 보면 저 주체할 수 없는 끼를 무대에서 풀지 않고는 못 살겠구나 싶어요. 노래하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나요?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저는 의외로 조용했어요.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어요. 공부도 제법하는 준 모범생이었습니다. 다만 학교에서 음악 시간에 반 대표로 노래해야 할 때는 불려 나가 노래하기는 했지만, 내성적이고 앞에 나가서 말하는 것에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친구보다는 좋아하는 연예인에 많이 빠져있었습니다. 민해경이라는 가수를 오랫동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연습을 많이 했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친구들과 춤추러 가는 것을 즐겼고 학과 공부보다는 16m 영화 동아리를 통해 다양한 영화를 많이 접했습니다. 

▲ <경기소리프로젝트 ’황제, 희문을 듣다’> 공연 및 음반 포스터 © 이희문 컴퍼니

▲ <경기소리프로젝트 ’황제, 희문을 듣다’> 공연 및 음반 포스터 © 이희문 컴퍼니

‘황제 희문을 듣다’라는 공연에서부터 포스터, 무대 의상 등이 남달랐습니다. 이희문에 대해 매력적인 부분은 공연을 만드는 데 있어서 시각적인 효과를 잘 고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를 접한 시절에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영화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제게 먼저 다가왔습니다. 저는 무대에 서는 사람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외모가 아름답지 않아도 자기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부각할 수 있는 스타일 작업이 중요합니다.
영화뿐 아니라 뮤직비디오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저는 마돈나, 마이클잭슨 같은 비디오형 가수들을 좋아했고 그들의 음악을 토대로 만들어진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에도 매료되었습니다. 크로스 커닝햄이라는 뮤직비디오 감독의 작품에 빠지기도 했어요.
대학 때는 가수를 하려고 기획사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잘 안 되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한 후에 일본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가수나 연예인에 대한 꿈을 대리만족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뮤직비디오 만드는 공부를 했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은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학교에서 주목하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일본의 유명 뮤직비디오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고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의 인생을 향해 달려갔었죠. 사소한 실수로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꿈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큰 좌절의 시간이었습니다.

경기민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어머니 공연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성인이 돼서 처음으로 이춘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풍월로 민요를 흥얼거렸는데 이 모습을 본 이춘희 선생님이 ‘소리해보는 게 어떻겠냐, 배우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나를 찾아와라’고 하셨어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는 제가 공부를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셔서 주변에서 아무도 소리를 권하지 않았습니다. 이춘희 선생님의 그 말씀이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리를 해보라는 권유를 듣는 순간이었습니다. 단순한 그 말 한마디가 제게는 큰 울림이 있는 말이 되었어요. 저는 그다음 날로 이춘희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처음에는 취미로 할 생각이었는데 선생님은 제가 부르는 ‘긴아리랑’을 듣고 대뜸 ‘너 소리 해야겠다’ 라고 하셨지요. 

한국에 와서도 뮤직비디오 제작을 계속했는데 어떻게 경기민요로 전업하게 되었나요?

처음에는 일이 없을 때만 이춘희 선생님의 학원에 가서 연습도 하고 놀고 했어요. 배운지 한 달 만에 대회를 나갔는데 성적이 좋았어요. 많은 경연대회를 나가다가 다시 대학에도 가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세 번째 가게 된 거죠. 생각보다 대학에서 공부를 많이 해야만 했어요. 대학 공부와 뮤직비디오 제작 일을 같이 하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마침 그때가 MP3가 보급되면서 음반 판매량이 크게 줄고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예산이 뚝 떨어지는 시기였어요. 이 일을 계기로 진지하게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늙어서도 계속할 수 있는 ‘소리’를 하기로 했죠.
제게는 소중한 일을 버리고 하는 ‘경기소리’라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 제가 혼자 노래할 수 있는 무대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노래가 하고 싶어서 무슨 방법이 있을까 찾다가 경연대회를 나가게 됐습니다. 경연대회에서 주어진 4분 정도의 무대가 제게는 소중했습니다. 경연대회는 유일하게 제가 잡가를 노래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많은 대회를 나갔었죠. 하도 많은 대회를 나가니 상금을 타기 위해 대회를 나온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거대한 힘이 이희문이 경기소리를 하게끔 인생을 돌고 돌아오게 한 것 같다. 그렇게 어렵게 찾은 ‘소리’이기에 무대가 그렇게 즐겁고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다. 

▲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잡> © 이희문 컴퍼니

▲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잡> © 이희문 컴퍼니

망사스타킹과 하이힐 등등 파격적인 무대는 대중에게 경기민요를 주목하게 하는 것에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 외에 다른 의도가 더 있을까요?

특별하게 생각하시는 의상이 제게는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있지는 않습니다. 아들이 많은 집안이라 제가 태어날 때 딸이었으면 하는 기대가 많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여장을 한 사진들이 있어요. 그리고 공연에 늘 바쁘신 어머니를 집에서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방식 중 하나는 어머니의 한복을 입고 어머니를 따라 하는 것이었어요. 여자 연예인을 동경할 때도 그녀처럼 노래하고 춤추는 연습을 많이 했었죠. 제게 여성적인 의상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무용가 안은미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제 안에 있는 감춰져 있는 것을 끄집어낼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쾌’를 할 때 이런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하는 공연이 제게도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가수 프린스처럼 중성적인 캐릭터를 연출하려는 것이었죠. 저에게 어렸을 때부터 경기민요는 여자들의 음악이었습니다. 이렇게 여장 의상을 입고 현대적인 의미로 풀어가는 것이 어쩌면 제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지금 함께 ‘놈놈’으로 공연 하는 신승태 씨를 만나서 저의 이런 퍼포먼스에 힘이 실렸습니다. 옆에서 받아주고 같이 할 사람이 있으니 더 재밌게 공연을 만들게 되었지요.
왜 이런 의상을 입느냐 물어보면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비주얼에 따라 다른 인격으로 넘어가는 그런 것이지요.

그동안 함께 작업했던 아티스트들이 매우 비범하고 특별했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성장하게 된 이희문이 궁금합니다.

가장 먼저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았고 이춘희 선생님을 통해 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정신적인 것을 지배한 것은 무용가 안은미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이태원 작곡가와 장영규 작곡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경기소리를 스마트하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작곡가 이태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태원의 논리적인 음악 분석을 통해 경기소리가 펼쳐낼 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영규 작곡가는 이런 것을 동물적 감각을 갖고 작업하는 분이었습니다.
이들 작곡가 외에도 함께 작업했던 정은혜, 안이호, 박민희에게도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이자람에게서 새로운 ‘밥그릇’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됐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이희문 컴퍼니>가 만들어졌습니다. 

이희문의 현재

이희문이 의도적으로 다양한 아티스트와 트레이닝을 하다 이제 그들을 벗어나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용가 안은미 선생님을 통해 만난 이태원, 장영규 같은 비범한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작업하고 싶다는 동경이 있었어요. 이런 소망은 다양한 공연을 통해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작업에서 그들은 저에게 잘 맞춰진 재단사 같은 분들이었죠.
이후에 무용가 안은미 선생님을 통해 미술작가, 기획자, 현대 무용가 등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들과의 작업은 또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이들과의 작업은 다른 장르와 함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즐거운 모험이었습니다. 오재우 미술작가, 정태유 사운드 디자이너, 재즈밴드 프렐류드 등등 새로운 아티스트와의 만남은 이제까지와 달리 각자의 장르를 바탕으로 수평적인 소통을 통해 새로운 공연물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이희문이 비범한 사람들과의 작업을 통해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고 이제는 새로운 음악을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난 후 그들과 같이 작업하게 되면 지금과는 다른 작업을 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이희문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계속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가는 생동감이 이희문이 가진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최근에는 이희문의 작업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공연을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자본론>을 모티브로 하는 공연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오재우 미술작가의 스마트함이 제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오재우 작가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미술을 전공하다가 현대무용을 하는 장현준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자신의 몸으로 미술을 표현하고 싶어서 현대무용을 하는 아티스트입니다. 두산아트랩에서 이들 작가와 같이 작업하게 됐습니다. 우리 셋이 무엇을 할까 이야기를 하다 현재 가장 고민을 하는 문제를 끄집어내게 되었죠. 현실적인 문제로 예술을 포기하게 된 후배의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책과는 친하지 않은 제게는 황당한 작업이지요. 지금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부터 읽고 있습니다. 아직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모르고 낯선 작업이지만 흥미롭게 해나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한 사람에 대한 동경이 그를 계속해서 새로운 음악으로 이끌고 있다. 또한, 그 동경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숨겨진 노력이 현재 진행형의 이희문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탐> © 이희문 컴퍼니

▲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탐> © 이희문 컴퍼니

팸스초이스에 선정이 되었습니다. 팸스초이스에 거는 기대는 어떤 것이 있나요?

팸스 초이스는 2014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선정되었습니다. 2014년에는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잡’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후 이탈리아 파브리카 유로파 페스티벌에서 전석 매진되고 아시아 최초로 오프닝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연의 규모가 너무 커서 다른 곳에서의 공연 요청을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올해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탐’은 해외진출에 쉬운 규모의 공연을 만들었습니다. 해외의 다양한 곳에서 공연할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 소리꾼 이희문 © 이강혁

▲ 소리꾼 이희문 © 이강혁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와의 작업뿐 아니라 전통의 깊이 있는 곳까지 파고드는 그의 관심이 이희문을 힘 있는 아티스트가 되도록 하는 원동력인 것 같다. 사람들은 현재의 그에 주목하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 이희문은 미래가 더 궁금한 아티스트라는 점이 기뻤다.

기고자 프로필

김성민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공연기획팀 팀장)
김성민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공연기획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