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정책의 학술적 추동력

2014.10.21

세계 문화정책의 학술적 추동력
[동향] 제8회 ICCPR(국제문화정책연구 콘퍼런스) 리뷰


국제문화정책연구 콘퍼런스(ICCPR, International Conference on Cultural Policy Research)는 2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대표적인 국제 문화정책 학술모임으로, 전 세계 각 지역의 문화정책학 연구자들의 교류를 주도하고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문화정책 연구의 동반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99년 17개국에서 140여 명의 학자가 노르웨이 베르겐(Bergen)에서 모여 첫 번째 컨퍼런스를 개최한 이후 ICCPR은 뉴질랜드 웰링턴(Wellington, 2002), 캐나다 몬트리올 (2004), 오스트리아 빈(2006), 터키 이스탄불(2008), 핀란드 이위베스퀼레(Jyväskylä, 2010), 스페인 바르셀로나(2012)를 거쳐 올해 여덟 번째 대회를 독일 힐데스하임(Hildesheim)과 베를린에서 개최했다. 특히 제 4회 빈 대회의 경우 52개국에서 4백여 명의 학자가 몰려들어 콘퍼런스의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줌과 동시에 급격하게 증가하는 전 세계의 문화정책에 대한 관심을 방증했으며, 이 규모는 올해 힐데스하임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번 힐데스하임 콘퍼런스의 경우 지난 2월 마감 당시 73개국에서 4백여 명이 넘는 학자들이 응모했으며, 학술 위원회 심사를 거쳐 그중 60여 개국 310여 명이 참여했다. 스케일과 더불어 ICCPR의 또 하나의 저력은 학회에서 계간으로 발간하는 국제문화정책연구저널(the International Journal of Cultural Research)이다. ICCPR에서 발표된 모든 페이퍼는 모두 자동으로 이 문화정책 분야에서 최고의 지명도를 자랑하는 이 저널에 기고될 기회를 갖는다. 때문에 콘퍼런스에서는 ICCPR의 실세라 할 수 있는 학술위원회 위원들이 저널에 실을 페이퍼를 채택하기 위해 각자 관심 분야의 발표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워낙 유명한 대회인 만큼 콘퍼런스 후 관련 분야의 다른 학술저널들의 게재 요청도 따라온다.

iccpr2014 힐데스하임, 독일

힐데스하임 대학교ⓒBrigit Winter/pixelio.de

iccpr2014 힐데스하임, 독일 힐데스하임 대학교ⓒBrigit Winter/pixelio.de

문화정책은 문화행사와 함께 - 창의적인 오프닝과 함께한 유쾌한 출발

올해 ICCPR을 유치한 독일 힐데스하임 대학은 하노버 근교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도시인 힐데스하임에 위치한 대학으로 1998년 문화예술연구 학부에 문화정책학과를 신설했다. 특히 2012년 유네스코 파리 본부는 힐데스하임 대학 문화정책학과를 “예술 발전을 위한 문화정책” 관련 유네스코 체어(UNESCO Chair)로 인증했으며, 볼프강 슈나이더를 유네스코 체어 석좌 교수로 임명했다. 독일 내에서 유네스코 체어로 지정된 대학은 힐데스하임까지 총 10개 대학에 불과하다. 힐데스하임은 대학뿐만 아니라 도시 자체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도시로 명망이 높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미카엘 교회(St. Michaeliskirche, 1010-1022년 건립)와 최근 120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마친 힐데스하임 주교좌교회(872~1061년 건립) 등 도시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넘은 중세시대 건축들은 모두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곳은 바로 콘퍼런스 장소로 사용된 힐데스하임 대학의 문화연구 학부 캠퍼스였다. 도시는 물론 본교와도 독립되어 있던 이 도매네 마리엔부르크(Domäne Marienburg)캠퍼스는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접근이 가능한데, 시내 외곽에 있는 숲 속 외딴 농장의 축사들을 개조하여 만든 건물들로 대부분이 15세기 독일 중세 건축의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도매네 마리엔부르크 캠퍼스ⓒiccpr홈페이지

셔틀버스를 기다라는 참가자들

도매네 마리엔부르크 캠퍼스ⓒiccpr홈페이지 셔틀버스를 기다라는 참가자들

이러한 시내 중심가와 학회의 공간적 분리는 바르셀로나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개최되었던 2년 전 ICCPR과 사뭇 대조되는 풍경을 보였다. ‘문화’를 논하는 만큼 ICCPR은 도시 선정에 있어 지역의 문화적 특성도 고려하는 학회로 유명하다. ICCPR을 유치하는 대학과 학술기관은 학회 발표뿐 아니라 참가자들을 위해 도시의 독특한 문화행사와 체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도시 자체가 다양한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던 바르셀로나에서는 주최측의 문화행사가 사실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참가자들이 알아서 도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각자의 구미에 맞는 문화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도시로 빠져나간 참가자들로 인해 정작 학회의 메인 행사라 할 수 있는 페이퍼 세션 일부가 텅텅 비는 역효과를 빚기도 했다. 고립된 장소에 콘퍼런스를 개최한 힐데스하임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참가자들은 학술발표와 토론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던 반면 주최한 힐데스하임 대학은 한정된 공간에서 도시와 학교를 어필할 수 있는 행사를 마련해야 했다. 기존의 콘퍼런스 세션 이외에 학회 이후 베를린 투어와 프로그램(12~13일)을 추가한 것은 소도시 힐데스하임이 가진 다양성의 한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베를린 프로그램을 제외하더라도, 올해 ICCPR은 개회식부터 다른 어떤 해보다 신선했다. 9월 9일 저녁 힐데스하임 시립극장에서 행해진 오프닝 행사는 딱딱하고 진부한 초대사 대신 힐데스하임 문화정책 전공생들과 교수들로 구성된 다양한 퍼포먼스로 구성되었다. 극장 객석 출입구를 통해 들어온 이들은 흰 장갑을 끼고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며 객석에 앉아있던 참가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무대에 들어섰고 이어서 직접 제작한 비디오 클립을 상영했다. 또 직접 밴드를 결성해 재즈 연주를 하고, 지역 예술가를 초청해 팬터마임을 선보였다. 예술성과 기발한 감각이 넘친 오프닝 행사에 여독과 긴장이 풀린 참가자들은 오프닝 전 서먹서먹하던 분위기와 달리 이어진 리셉션에서 상당히 활기 넘치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서로서로 소개하고 인사를 나눴다.

iccpr2014 개막행사

iccpr2014 세션 발표

ICCPR 2014 폐막행사 (힐데스하임) ICCPR 2014 베를린프로그램 환영인사

유럽 중심주의에서 탈피, 더욱 다양해진 문화정책 담론들

ICCPR은 문화정책을 다루지만 ‘문화’에 대한 개념을 따로 규정해 두지 않는다. 이는 ‘문화’라는 용어가 가지는 그만큼 복잡하고 포괄적인 의미 때문이다. 대신 매년 주최 측은 일반적인 문화정책 세션과 별도로 문화와 관련한 특정 이론적 테마를 지정해 그에 대한 집중적인 토론과 발표 자리를 갖는다. 2012년 바르셀로나가 ‘문화와 정치’라는 테마로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는 다양한 문화정책을 논했다면, 2014년 힐데스하임은 국가 간 교류와 국제 환경 안에서 문화의 역할과 정책적 영향에 초점을 맞추었다. 실제로 바르셀로나와 비교할 때 힐데스하임 ICCPR의 또 하나의 특이점은 유럽 및 미주 국가 이외에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의 참가자가 부쩍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중동 및 아프리카 학자들의 증가는 그동안 아랍 문화정책 그룹과 함께 컬래버레이션 연구를 지속하고, 현지 학자들과 다양한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주도해 온 힐데스하임 대학이 오랫동안 공들여 구축해 온 네트워크에 힘입은 것이었다. 한국인 참가자만 해도 바르셀로나에서는 영국에서 유학 중인 한국 박사과정 유학생과 현지 박사과정 유학생 한 명이 발표했을 뿐이지만 올해에는 유럽 현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학자 및 유학생은 물론 숙명여대 김세훈 교수, 김세준 교수 및 서울시립대 서우석 교수 등이 한국의 복지정책에 대해 발표했다. 또한 일본 도쿄대학교에 박사과정으로 재학 중인 한국인 유학생들이 일제 식민지 시절 극장 정책(이지영)과 한국 영화산업 정책(정인선)을 발표했다. 이러한 학회의 다국적 분위기는 서로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개념들을 학술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차원의 문화정책 담론들 – 문화 향유 권리, 다양성에서부터 중동 및 동아시아에서 주로 문제시되는 문화 안의 윤리적 담론과 그에 따른 갈등 문제에 이르기까지 – 을 토론에서 끌어낼 수 있었다. 참가자 개인적으로는 전 세계에 걸친 폭넓은 문화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보탬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동안 ICCPR에서 내부적으로 문제시되던 유럽 중심주의를 탈피하는 움직임으로도 해석되었다.

iccpr2014 포커스 토론

iccpr2014 한국 참가자 발표

ICCPR 2014 패널토론 ICCPR 2014 논문 발표

물론 기존 테마 외에도 ICCPR에서는 ‘문화’라는 용어가 그러하듯 방대한 분야의 주제가 다뤄졌다. 각국의 예술정책은 물론 UN, EU 등 국제기관의 문화정책에 얽혀 있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 컨텍스트, 각종 영리 기관의 문화산업, 그리고 NGO의 정책들도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중요한 정치적 콘텍스트에 엮여 있는 것을 분석하는가 하면, 자국 정부와 박물관, 공연장 등 각종 기관의 자체 문화정책 및 영리 기관의 문화산업, 그리고 NGO 등의 정책들도 논의되었다. 수적(數的)으로 보면 도시 디자인(Urban design)을 비롯한 도시재생 정책 발표가 두드러지게 증가한 반면 미디어 및 문화산업과 관련된 이슈들은 바르셀로나 학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한 추세를 보였다.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의 참가자들은 분열과 종족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자국 내 문화정책의 규범적 요소에 대해 열띤 비판을 가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도입된 암묵적 문화정책(implicit cultural policy)분야는 종교/내러티브/상징 등 다채로운 주제로 분화되어 개별적으로 세션이 열릴 만큼 2년 만에 양적, 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올해 처음 개설된 ‘내러티브와 문화정책’(narrative policy) 세션은 만석으로 인해 일부 청중이 서서 발표를 지켜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세션에서 클라우디아 키비치-레브노누(멕시코, 레온 국립대 교수)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시대 음악가와 현대 멕시코의 토종 음악 그룹을 둘러싼 그들의 ‘신동 내러티브’를 비교분석하며 이러한 내러티브 형성이 실제 문화정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발표했으며, 제레미 아헨(영국 워릭대 교수)은 프랑스의 두 문인의 소설 속에 어떤 문화정책이 굴절되어 있는지 살펴봤고, 콘스탄스 드베로(미국 콜로라도 주립대 교수)는 미국 예술정책에 숨어있는 시민종교 및 영웅주의 내러티브를 분석했다. 이러한 주제의 다양화와 그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문화정책’이라고 하면 공공정책, 복지정책, 예술정책 분야만을 떠올리던 과거와 비교할 때 매우 진일보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세션 참석을 기다리고 있는 참가자들

세션 참석을 기다리고 있는 참가자들

ICCPR 2014 등록데스크

다른 한편으로, 다양화된 주제와 국적은 각 나라, 각 분야의 문화정책에 암묵적으로 내재된 정치적 목적을 거론할 수 있는 토대를 콘퍼런스에 마련해주었다. 이번 학회의 호스트인 힐데스하임의 볼프강 슈나이더 교수는 문화정책을 연구하는 데 있어 정치적 맥락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시각은 단지 지식의 발전을 위한 것 뿐 아니라 훗날 평등한 사회 개혁에 보탬이 될 것이라 역설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문화정책은 각 개별 국가 단위로 시행되고 있지만, 문화담론이 아직도 여전히 유럽문명 중심적인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이번 학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 폐회식에서는 리서치를 통해 정의와 단합을 어떤 식으로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단순히 문화정책 연구가 개개인의 경력 향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이를 토론하며 다수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일종의 사회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견이 이 자리에서 제시되었다.

2016 ICCPR은 서울로 : 최초의 아시아 개최지

참가자들이 토론과 발표에 열을 올리는 동안 힐데스하임 한편에서는 서울과 영국 리버풀, 그리고 벨기에 안트베르펜이 다음 ICCPR 유치를 위해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제8회 ICCPR이 폐회된 지 일주일 후 힐데스하임 ICCPR 위원회는, 2016년 제9회 ICCPR은 숙명여대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호스트로 서울에서 개최한다는 마지막 레터를 참가자 및 회원에게 발송했다. 1999년 ICCPR이 시작된 이래 최초의 아시아 지역 개최라는 의미가 부여된 2016년 행사에서, 서양과는 다른 문화정책과 담론들이 다양하게 펼쳐질 것을 기대해 본다.

ⒸICCPR 홈페이지/예술경영지원센터


기고자 프로필

노승림_영국 워릭대 문화정책 박사과정
노승림_영국 워릭대 문화정책 박사과정

노승림은 음악칼럼니스트로, 현재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문화정책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 공연예술전문지 월간 [객석]에서 음악담당 기자로 활동한 이후 성남문화재단을 거쳐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여러 매체와 공연전문지에 공연과 음악 관련 인터뷰 및 칼럼을 다수 기고했다. 역서로는 『페기 구겐하임』(한길사), 『음악과 권력』(컬쳐북스), 『평행과 역설』(마티) 등이 있다.